닫기

[청년정책/활동 쟁점정리] 연속대담 #22016년 11월 23일

< 대담 #2. 페미니즘, 청년을 향하다 >

 

2016년은 한국 페미니즘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한 해이다. 이른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스스로를 생존자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겪어왔던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 대해 토로했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했던 적대적인 환경들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몇 달이 흘러 이제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집단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문단 내 성폭력’에 대한 폭로를 시작으로 그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던 피해자들이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다. 지난달 실시된 설문조사(전국언론노조, 더불어민주당 권미혁 의원실)에 따르면 출판계 노동자 10명 중 7명은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보다는 여성이,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이 피해를 받은 경우가 많았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더 취약한 구조이다.

 

인터넷에서는 여전히 ‘여성혐오’의 정서가 만연하다. 출산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여성, 군대에 가지 않는 특혜를 받는 여성, 된장녀, 맘충, 김치녀 등 여성을 힐난하고 비하하는 표현들이 넘쳐난다. 이들의 타깃이 되는 건 주로 20~30대 젊은 여성들이다.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의 살아남기는 청소년기부터 시작돼 청년기에 본격화되는 문제이다. 청년세대 담론과 페미니즘에 관하여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 박이대승 소장이 여성학자 권김현영과 대담을 나누었다.

 

* 대담자: 권김현영 (성공회대 여성학 강사)

* 면담자: 박이대승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 소장)

 

(권김현영 사진)

SONY DSC

 

< “삼포 세대는 남성중심적·이성애중심적 담론” >

<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는 것은 주로 남성의 입장”>

 

박이: 일단 시작은 세대 담론과 청년 담론에 대한 일반적인 것에서 시작하면 어떨까요. 예전에 세대 담론에 대해서 얘기해주신 것 있잖아요. 삼포 세대나 이런 개념들이 어떤 관점에서 구성된 것인지 설명을 해주실 수 있나요.

 

권김: 몇 년 전에 강의할 때 삼포 세대를 설명하면서 완전히 남성 중심적인 담론이라고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삼포 세대가 포기했다는 게 연애, 결혼, 출산이죠. 그러니까 주로 성과 관련한 사회적 관계를 포기한다는 식의 얘기였는데요. 그것을 얘기하는 기준이 남성 중심적이라고 말했던 건, ‘포기’라는 단어 때문이었어요. 결혼을 안 하기로 포기하고 연애를 안 하기로 포기하고 출산을 안 하기로 포기했다는 건 마치 자기가 성취해야 하거나 원래 가져야 할 것을 가지고 있지 않게 된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결혼만 하더라도 여자와 남자는 완전히 다른 컨셉이에요. 여자들은 가능하면, 사회경제적 조건이 된다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고 싶어 하죠. 반면 많은 경우에 남성들은 사회적 조건이 된다면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니까 결혼을 ‘포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많은 경우에 남자의 입장인 거죠. 이성애 남성들에게는 결혼이 성취의 일부가 되지만, 여성들에게는 결혼과 출산이 사회적 성취를 포기해야 하는 문제가 되기도 하니까요.

 

결국 삼포 세대라는 건 자기가 원래 가져야 할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 남성의 입장으로 묘사됐죠. 사실 여자들의 입장에서 구성된다면 ‘포기’가 아니라 ‘탈출’이라거나, 비혼을 선택하게 됐다고 얘기하거나, 아니면 연애에 관심이 없어졌다고 얘기하거나, 출산을 안 하겠다고 결정하거나, 이런 얘기였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 담론 자체가 명백하게 남성중심적인 어떤 형상들을 가정하고 만든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삼포 세대가 딱 등장하고 난 다음에는 여자들 스스로가 마치 결혼을 포기한 것처럼 얘기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건 뭐냐면 담론이 보수화되었다는 얘기거든요. 그러니까 마치 청년 세대의 부박한 현실을 이야기할 때, 결혼과 출산을 당연히 원했던 것처럼 가정하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삼포 세대가 두 가지 효과를 발휘했다고 생각하는데요. 하나는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적이고, 두 번째는 이성애 가족을 구성하는 욕망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 담론이기 때문에 일정 정도의 보수화를 만나게 될 수밖에 없는 담론이라는 비판을 강하게 했던 거죠.

 

< “저출산 문제, 인구감소 위기가 아니라 여성의 위기로 접근해야” >

< “유럽 모델처럼 가족시장 개방·다양한 가족구성이 해법” >

< “아시아에서 결혼은 여전히 전근대적 제도, 인식전환 필요해” >

 

박이: 방금 논의의 연장 선상에서 저출산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작년까지만 해도 청년이라고 했을 때 주된 문제는 이른바 장그래로 대변되는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또는 실업자의 문제였어요. 그런데 올해부터 급격하게 인구감소 또는 저출산과 같은 문제가 얘기되고 있어요. 청년 문제라는 것이 이제는 미래세대의 재생산 문제이고 저출산을 어떻게 해결한 것인가의 문제로 논의되는 거예요. 저는 이런 식의 접근이 잘못된 문제 설정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최근에 나오고 있는 저출산 관련 논의들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권김: 한국에서 저출산 관련된 국가적 정책이 시작된 것은 2004년이에요. 이때 국회에서 관련 결의안을 채택하고 법령을 만들어 ‘저출산·고령화 대책 특별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초저출산사회에 진입해있고 고령화사회를 목도하게 된 상황에서 2004년 이후부터 정부부처에서 했던 일을 요약하면 한마디로 결혼을 더욱 억압적인 제도로 만드는 것이었어요. 첫째로 2005년 이혼숙려제를 도입해서 이혼을 쉽게 못 하게 해요. 두 번째로 결혼을 가능한 한 많이 하게 하죠. 예를 들면 공무원들을 듀오(결혼정보업체)에 가입시킨다거나 농촌 총각들에게 국제결혼을 정책적으로 장려하는 거죠. 이런 걸 저출산 정책이라고 하니까 당연히 실패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저출산 관련 정책들은 대부분 실패했어요.

 

여성학자들이 계속 이야기했던 것은 저출산 문제의 원인은 경제위기라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경제위기로 인한 고용 불안정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정부에게 두 번째로 이야기한 해결책은 가족 시장을 개방하거나 다양한 가족 구성을 인정해주는 것이 저출산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라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혼자 아이를 키울 수 있게 해주고, 비혼모들에게 똑같은 권리를 주고, 동거 연인한테도 아이를 낳아서 쉽게 키울 수 있는 똑같은 제도적 혜택을 제공해주고, 이런 것들이 유럽에서 성공했던 저출산 정책이라고 제안을 했어요. 하지만 그런 급진적인 정책은 아시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응이 돌아옵니다.

 

박이: 그 지점에서 저출산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십니까?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이나 보수적 우파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어쨌든 저출산은 위기라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를 하고 해법에서 달라지는 수준이라고 본다면, 여성주의의 입장에서는 저출산 논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권김: 여성주의 담론은 대체로 ‘저출산이 위기’라는 점에는 합의하는데 그 위기가 누구의 위기인지에 대한 생각이 다르죠. 다만 여성주의에서는 저출산 문제를 ‘인구감소의 위기’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돌봄 영역의 공백’이라는 위기로 보자는 점이 다릅니다. 여성들이 출산을 선택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고 있거나, 비정규직화되고 있거나, 아이를 낳고 안정적으로 키울 수 있는 사회적인 공교육 시스템이 하나도 안 되어 있다거나, 이런 사회적 문제들이 저출산이라는 현상으로 드러났다고 본 거죠.

 

“아이를 낳는 여자들이 아이를 낳고 난 다음에 믿고 맡겨 키울 데가 없다.”, “공교육 시스템이 무너졌다.”, “그렇기 때문에 안 낳고 안 키우는 거다.”라는 방식으로 여성주의 담론에서 저출산 얘기를 해왔죠. 엄마를 착취하거나, 할머니를 착취하거나, 아니면 돈으로 해결하거나, 이런 방법 말고는 없잖아요. (출산과 육아로 인해) 취업 시장에서의 엄청난 차별을 감당해야 하고요. 이렇게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방식으로 저출산 위기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던 게 여성주의 담론에서 저출산 문제에 대해 비판적 개입을 해온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이: 장기적인 해법에서 아까 말씀하신 대로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서 저출산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대한 것을 보면, 프랑스도 이제 전통적인 결혼 제도라는 것은 거의 남아있지 않거든요. 더구나 작년에 동성결혼까지 인정되면서 제 주변에서도 올해만 다섯 커플 정도가 애를 낳았는데 이 중에 이른바 결혼을 했다고 하는 커플은 한 커플 정도로 극히 드물어요. (결혼하지 않고 출산하는 것이) 매우 일반화되어 있는데, 이런 얘기를 하면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관료들은 아시아에서는 안 된다.”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단순한 질문으로 아시아에서는 정말 안 되나?” 이런 의문이 들어요. 과연 그것이 아시아이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인지, 아시아의 문화적 특성 때문인지 경제적 구조 때문인지, 실제로 한국사회에서 그런 식의 결혼제도의 대대적인 개혁이 가능한 것인지 고민이 들어요. 예를 들어 진선미 의원이 최근 파트너등록법을 발의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실제로 한국에서도 주장이 될 수 있을 정도일까요?

 

권김: 이게 문제예요. 일단 아시아의 특성, 아니 한국 결혼 제도와 문화의 특징이 있기는 있어요. 한국에서는 여전히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근대화되어있지 않다고 해야 할까요. 결혼을 부부간의 결합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가문 간의 결합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사돈 관계라는 게 여전히 굉장히 중요하죠. 상류층뿐만 아니라 중산층이나 중하층에서도 결혼을 개인의 선택이나 부부가 되는 문제로 인식하기보다는 가족 전체가 관련된 문제이자 일종의 가족 사업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점이 여전히 너무 강하기 때문에 동거 연인 자체가 그다지 가시화되지 않고, 이들이 동거라는 상황을 유지하면서 아이를 낳는다는 인식으로 문화적으로 이전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러니까 사실은 파트너법으로 해결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한국은 전통적으로 조선 시대의 경우 ‘계급혼사회’라고 해서 대부분 결혼을 하거든요. 그 시기의 유럽 다른 나라들을 보면 결혼하지 않은 인구가 10% 이상은 돼요. 그런데 한국은 굉장히 적었어요. 혼인하지 않은 여성들 자체가 통계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비가시화되었죠. 30살 이후에서 혼인하지 못한 여성들에게 국가가 혼수를 마련해주는 제도가 있을 정도였어요. 결혼하지 않으면 사회 질서에 아예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못한 여성을 국가 차원에서 돕는 건 일종의 구휼제도였던 셈입니다. 그런 사회이니만큼 결혼은 경제생활의 토대가 되었고 엄격한 규범 속에서 실행됩니다. 일례로 우리 사회는 사람들 앞에서 남편이나 아내를 자랑하는 것보다는 흉보는 게 익숙한 문화예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냐면, 기본적으로 결혼이라는 걸 가족 간의 결합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둘 사이에 얼마나 애정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결혼생활의 부수적인 문제로 생각한다는 거죠. 이런 식으로 여전히 한국은 결혼이 굉장히 전근대적인 사회 제도이기 때문에 결혼 자체가 개혁되지 않고서는 좀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 “인터넷 혐오 공간은 정치적 올바름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세계” >

< “혐오가 아니라 폭력·차별 등 정확한 개념어로 표현해야” >

< “법적 소송이 인터넷 논쟁을 합리적 논의의 장으로 끌고 나올 것” >

 

박이: 다음 주제로 혐오와 관련된 문제를 이야기해 보려고 하는데요. 일단 우리가 혐오에 대해 논의해야 하는 이유는 뭐냐면, 제가 보기에는 청년이라는 말의 의미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사실 별 게 아니라 인터넷 사용자인 거 같아요. 인터넷 여론 층인 거죠. 예를 들어 인터넷에서 많이 떠도는 얘기가 있으면 청년들이 이렇게 얘기한다.”라고 가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혐오라는 사회 현상이 이른바 청년들과 관련된 사회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첫 번째로 혐오라고 불리는 어떤 사회적 현상이 있죠. 인터넷을 통해 드러나는 현상들 서로 싸우고, 논쟁을 벌이고, 정치적 행동을 하는 어떤 사회적인 현상이 있고요. 두 번째로는 이 현상을 혐오라고 부른다는 어떤 언어적인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두 가지를 모두 다뤄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왜 그렇게 싸우는 걸까?”, “이 싸움의 양상은 뭘까?”, “이 논쟁은 어떻게 이해돼야 할까?”라는 문제와 더불어서 이것을 혐오의 문제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맞느냐?” 하는 언어적 수준의 문제, 두 가지가 있는 거죠. 먼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실제적인 사회 현상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온라인에서 페미니즘을 둘러싼 수많은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권김: 일단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혐오라는 것이 발흥하고 있죠. 여기서 혐오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정확한 언어의 사용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공통점이 있어요. 젊은 우익들의 등장이죠. 그리고 그 젊은 우익들을 중심으로 한 우익 정치인들의 성공적인 정치적인 세력화가 있죠. 이들은 국가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국민을 등급으로 나누어서 자경단처럼 행동합니다. 여기에 깔려있는 건 어쨌든 혐오라는 정서였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이 혐오의 대상이 누구냐를 보면 이민자, 동성애자, 여성, 장애인, 한국 같은 경우는 전라도 정도가 포함되는 것 같아요. 대부분 사회적 약자들이죠. 그러니까 사회가 계속 그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얘기해왔던 집단들에 대해서 대대적인 반동 형성이 만들어진 거예요. 이것을 여성주의에서는 백래쉬(back lash)라고 하는데요. 기본적으로 혐오라는 정서에 깔려있는 가장 큰 것은 권리를 줄 수 없는 집단들에게 잘못된 권리를 줬다고 보는 정서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지목되는 거죠. 여자, 동성애자, 이주민, 전라도, 이런 집단들.

 

박이: 그럼 언어적 수준의 문제를 얘기해볼게요. 제 생각에 일베가 인터넷상에서 이른바 여성 혐오적 발언을 하고 다니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언어적 폭력’, ‘언어적 성폭력’, 혹은 언어적 공격이렇게 얘기하는 게 맞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혐오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권김: 폭력이라고 얘기를 하려면 전제해야 하는 것이 뭐냐면, 폭력적이지 않은 세계를 형상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인터넷에는 폭력적이지 않은 세계가 없어요. 기본적으로 공격의 문화였다는 거죠. 그래서 이것을 폭력이라고 신고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도 않았던 거예요. 공격이나 폭력 자체가 문제 되는 세계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세계일 텐데, 인터넷 특히 ‘일베’ 같은 공간은 정치적 올바름이 전혀 작동할 수 없는 세계인 거죠.

 

폭력을 하지 말라고 얘기하려면 설득이 돼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공간에서는 폭력이라고 지적하면, “무슨 소리야?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얘기야. 우리 다 이러고 놀고 있는 거야. 네가 그렇게 기분 나쁘면 그냥 나가면 되지. 여기서 놀지 마.” 혹은 “여기가 원래 이런 곳인지 몰랐어?” 이렇게 반응을 해요. 그러면서 폭력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을 ‘운동권’ 혹은 ‘씹선비’라고 부르면서 다 내쫓는 거죠. 그래서 폭력이라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결국, 새로운 말이 필요하게 되고 그래서 혐오라는 단어가 나온 거죠.

 

박이: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나오게 되겠죠. 그냥 둘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저는 그렇다면 외부에 어떤 다른 논의공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터넷 외부이든 인터넷 내부에 어디든 문제를 느끼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는 이걸 뭐라고 분명하게 불러줘야 하지 않느냐는 거죠.

 

사실 인터넷 자체가 폭력적인 공간이에요. 인간과 인간이 서로 공격하고, 죽고 죽임을 당하는 하나의 공간인데, 그렇다면 이것을 분명하게 표현해주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할 거냐, 저는 혐오가 아니라 다른 말로 정확히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보통 이것을 혐오라고 접근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웠어요. 사람들이 왜 이걸 혐오라고 부를까요? 혐오는 한국말로 잘 쓰지도 않는 말이잖아요. ‘미소지니(misogyny)’‘hate’의 번역어라고 보기에도 이상하고요.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나는 정서적인 방법으로 누군가를 공격하고 죽이고 있고 누군가는 나를 죽이고 있는데, 내가 하는 행위를 공격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서, 내가 하는 행위를 폭력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서, 내가 하는 행위는 혐오라고 부르는 것 아니냐는 거죠.

 

사실 혐오라는 말은 의미가 없는 말이죠. 의미가 없는 언어인 거예요. 제 책의 주제이기도 한데, 한국 사회의 언어 사용법이 되게 특이해요. 의미가 분명한 개념어가 있고, 의미가 아예 없는 정치적인 어떤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말들이 있는데, 인터넷은 사실상 고정적인 의미의 개념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에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가진 단어 자체를 아주 적극적으로 거부하잖아요.

 

권김: 차별이나 폭력이라고 얘기하면 법적 문제이고 구조적인 문제예요. 그런데 혐오는 감정적인 문제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혐오하는 거면 그냥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차별이나 폭력이라는 말이 아니라 혐오라는 말에 반응했다고 생각해요.

 

저도 동일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뭐냐면, 강남역 살인사건이 난 다음에 (인터넷에서) 이건 여성혐오가 아니라고 얘기한 이유가 그게 여성혐오로 명명되면 자기들의 여성혐오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에요. 여성혐오라고 하는 것이 문화적인 토대였고 그것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그 사건을 여성혐오라고 얘기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묻지마 살인사건, 범인이 굉장히 이상한 놈이라고 하는 거죠. 우리가 하는 여성혐오는 그냥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거죠.

 

재밌는 건 뭐냐면, 차별은 차별행위로부터 구체적인 특권을 얻어요. 그런데 혐오는 구체적으로 특권을 얻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쾌락이 되거든요. 앞서 이야기한 국가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젊은 우익 집단들은 차별을 통해서 특권을 얻거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들이 오히려 역차별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역차별의 증거는 사실 별로 없거나 대부분 억지이거나 아니면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거든요. 큰 단위의 통계에서는 여성의 임금이 남성보다 적고, 직업선택의 기회나 승진에서 차별받는 것, 경력단절을 비롯한 육아 고충의 문제, 성폭력을 비롯해 젠더 폭력의 희생자 비율에서 여성이 압도적인 것 등등 명백하게 여전히 성차별적인 사회입니다. 하지만 그런 걸 믿을 수 없어 하죠. 왜냐하면 자신은 그런 차별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게 없거든요. 실제로 젊은 우익 남성 집단들은 윗세대의 남성들과는 달리 가부장체제의 특권을 누릴 수 있을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성차별적인 구조적 문제는 역차별의 특수 사례로 물타기를 하고, 혐오라는 쾌락을 생산하며 집단적으로 자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국가에 완전히 동일시하면서요.

 

박이: 그렇다고 한다면 아까 말한 폭력, 차별, 공격 이런 단어 말고는 사실 규정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이죠. 결국, 왜 문제냐고 했을 때 성폭력이든 언어적 폭력이든 명예훼손이든 제도 내에서 어떤 개념어로 다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잖아요. 그래서 지금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을, 이른바 합리성의 언어와 의미를 가진 말들로 구성된 논의의 테이블로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그런 논의 테이블로 가져오는 자체가 강력한 정치적 입장인 것 같아요.

 

권김: 동의해요. ‘그걸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여러 고민이 필요하고, 그중 하나가 예를 들면 소송이라고 봐요. 흥미로운 게 요즘 남초 커뮤니티의 유저들에 의해서 ‘예스컷’ 운동이란 게 나왔습니다. 그동안은 인터넷에서 검열을 한 번도 수용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예스컷’을 주장하는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은 ‘메갈’로 대표되는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해 검열하자고 얘기합니다. 지금 인터넷에서 고소, 고발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이 사건들이 어떻게 정리되느냐에 따라 다시 규칙이 만들어질 거예요. 저는 다음 단계에서는 그 싸움의 결과들이 아주 중요할 거라고 봅니다. 소송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명예훼손이 되는지, 성별에 따른 다른 기준이 어떻게 작동되는지가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겠죠. 하지만 저는 개별적인 소송들을 통해 개인들이 그 모든 것을 감당하는 방식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국가의 혐오발화에 대해 집단소송을 걸어본다거나 하는 식의 다른 싸움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정리하자면, 법적인 공간 안에서 기준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 기준들은 개개인의 소송을 통해서 판례를 쌓는 방식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들의 집단적 각성 계기” >

< “개별 피해자가 아닌 집단 내 피해자들로서 함께 대응하기 시작” >

 

박이: 다음으로 현재의 쟁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은데요. 지금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사건들이 터져 나오고 있잖아요. 문단, 문화계, 출판계, 영화계, 사진계, 안 터진 곳이 없죠. 이런 흐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게 어떤 우발적인 계기 때문에 튀어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의견을 들어보고 싶네요.

 

권김: 일단 ‘미러링’이라고 하는 방식, 즉 어떤 식의 공격을 되받아치는 형태를 통해서 그동안의 이야기들이 ‘들릴 수 있게’ 만드는 조건들이 있었고요. 강남역 같은 사건을 통해서 사실 여자들이 집단적으로 각성을 했죠. 각성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냥 깨달은 거예요. 남자들은 집에 들어갈 때 서로 택시 번호 같은 걸 교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그러니까 여자들만의 짐이었던 어떤 식의 안전하지 않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집단적으로 깨닫게 되는 계기가 있었던 것이고요.

 

‘○○ 내 성폭력’이라는 문화는 어떤 집단 안에 있었던 여성들이 개별 여성으로서 개별 가해자를 적시했던 방식과는 다르게 집단으로서 이 문제를 얘기한 거예요. 어떤 영역 안에서 있었던 여성혐오와 차별 문화라는 것을 고발하는 집단 지식의 장으로 아카이빙하기 시작한 걸로 보였거든요. 그러니까 정말 아카이빙이 시작됐죠. 젊은 여자 제자들에게 은교라고 부르는 소설가의 무례하고 추레한 욕망이 공격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 문화가 얼마나 오랫동안 통용되어 왔는지에 대한 얘기를 같이 하게 되면서 집단지식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인 것 같아요. 기존과는 분명히 다르죠.

 

그리고 그게 가능해졌던 것은 물적 조건의 변화 때문이에요. SNS라는 방식의 물적 조건. 이전과는 달리 자기가 숨지 않고 구조적인 문제를 얘기할 수 있는 폭로의 장으로 SNS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움직임들이 이어질 수 있었던 거겠죠. 사실은 페미니즘이라고 하는 게 굉장히 흥미로운 운동인 것은 물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서 언제나 독자적인 운동량을 만들어내요. 그중에 하나가 ‘○○ 내 성폭력’ 같은 거죠. SNS라는 물적 조건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독자적인 운동량이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정리하자면, 그동안 배제되었던 사람들이 계속 말하고 있었는데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러링은 그야말로 목덜미를 잡고 들으라고 하는 방식이었고, 그렇게 되니까 사회가 응답하기 시작했어요. 말하기는 당분간 계속 진행될 거예요. 문제는 고발당한 개인과 사회가 과연 변화할 것인가에 달려있겠죠.

 

박이: , 감사합니다. 오늘 대담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다음 주 대담에는 정치발전소 교장 박상훈 님을 모십니다. >

* 기사 작성: 박아름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 연구원, 前 SBS 기자)

* 대담 순서
1주 : 왜 청년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가? –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 박이대승 소장
2주 : 페미니즘, 청년을 향하다 – 권김현영 성공회대 여성학 강사
3주 : 청년이 제기하는 민주주의의 문제들 – 박상훈 정치발전소 교장
4주 : 청년의 노동, 활동, 소득 – 홍기빈 칼폴리니사회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
5주 : 청년정책인가, 사회정책인가? –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대담 제목은 추후에 변경될 수 있습니다.)

공유하기 Share on Facebook Tweet about this on Twitter

서울시 청년허브

서울시 은평구 통일로 684.1동 1층 (녹번동 5번지)

우)03371

Tel. +82-(0)2-351-4196 Fax. +82-(0)2-351-3580

Email. contact@youthhub.kr

청년허브 개인정보정책

이 웹사이트에 게시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라이선스 이미지

맨 위로